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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칼럼)

생명의 징검다리, 글리벡

생명의 징검다리, 글리벡

 

글. 이성임

2001년 11월 26일

 

10개월 된 아들을 저의 배 위에 올려놓고 장난치며 놀다가 우연히 왼쪽 아랫배에 국그릇만한 혹 같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동네 병원에 가서 초음파를 찍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백혈병 같다’고 하시며 큰 대학병원으로 빨리 가라고 했습니다.

 

‘백혈병’이라는 소리에 문득 작년엔가 '사랑의 리케스트'에서 죽음을 향해 무섭게 달려가는 백혈병을 한번 막아 보겠다고 환자와 환자가족들이 엄청난 치료비와 고통도 감수하며 투병하는 모습이 떠올랐고 덜컹 겁이 났습니다.

 

여의도성모병원 응급실에 입원해서 혈액검사을 받았을 때만 해도 만성골수성백혈병 중에서도 경과가 좋은 만성기 같다고 했는데 골수검사 결과는 이미 만성기를 지나 가속기로 접어든 상태였습니다. 만성기와 달리 가속기는 골수이식을 하지 않으면 3~6개월 안에 사망하고 골수이식을 해도 성공률이 20% 정도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듣고는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그래도 저는 언니와 일란성쌍둥이라서 100% 일치하는 골수가 있기 때문에 골수이식을 받으면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가속기 상태에서는 보험적용이 안되어 골수이식 비용만 4천만 원 이상 든다는 말에 이젠 정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희망의 소식이 전해 왔습니다. 꿈의 신약이라고 불리는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이 미국 FDA 승인이 났고 한국의 가속기, 급속기 환자는 무상으로 복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치의 선생님께서도 ‘글리벡’이 효과가 있으면 가속기 상태에서 만성기 상태로 환원시켜 보험적용도 가능하고 골수이식 성적도 매우 좋을 거라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글리벡을 처음 먹을 때의 그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사장이 성스러운 물건을 처음 만질 때처럼 저는 글리벡 6알을 두 손에 꼭 잡고 ‘이 약 먹고 꼭 살게 해 주세요’라고 신에게 한참을 기도하고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격도 잠시 구토와 근육통은 다시금 죽음의 공포로 저를 몰고 갔습니다. 만성기때 글리벡을 먹지 못하고 급속기가 되어서야 글리벡을 먹게 된 투병 동기 신상아는 구토가 너무 심해 10알의 글리벡을 먹는 쪽쪽 토해서 결국은 글리벡 효과를 경험도 해보지 못하고 먼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상아는 저에게 보낸 마지막 메일에 ‘저는 언니처럼 부작용에 한번 시달려 보는 것이 소원이에요. 먹으면 모두 토해 버리거든요. 안 토하는 방법 있으면 좀 가르쳐 주세요?’라고 물었지만 저도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해주지 못했습니다.

 

상아의 죽음을 보고 난 뒤부터 저도 글리벡이 소화되어 효과를 나타내는 1시간 안에는 구토를 하지 않으려고 모든 방법을 다 시도해 보았지만 자주 구토를 했고 그러면 구토한 음식물을 손으로 휘어 저으면서 글리벡을 찾아서 다시 꾸역꾸역 먹었습니다. 글리벡이 구토한 음식물과 섞여서 악취가 나고 징그러웠지만 그런거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안 먹으면 죽으니까요.

 

그리고 근육통은 도끼로 내리치는 것처럼 아팠지만 남편과 엄마가 종아리와 허벅지를 주물러 주면 조금 괜찮아지고 했습니다. 그때 남편이 얼마나 많이 주물었던지 지금도 남편은 습관적으로 저의 종아리와 허벅지를 주무릅니다.

 

부작용으로 한 달 정도 고생했지만 글리벡을 먹은지 한달 만에 혈액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세달 만에 골수검사에서 암세포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글리벡을 먹은 지 열달 째 되었을 때 골수검사 결과는 정상인과 거의 같은 수준이 되었고 곧 분자생물학적 관해 상태를 바라보게 되었지만 골수이식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때까지도 글리벡의 생명연장에 대한 임상자료가 충분하지 않았고 최상의 상태에서 골수이식을 해야 성공률도 높았기 때문에 저는 골수이식에 동의했습니다.

 

글리벡을 먹고 난 뒤 상태가 좋은 환자들은 대부분 골수이식 후 합병증과 후유증의 위험이 적은 미니이식을 하였지만 저는 일란성쌍둥이인 언니의 골수를 받기 때문에 재발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표준이식을 받았습니다.

 

골수이식 후 CMV바이러스 감염, 대상포진으로 조금 고생한 것을 제외하고는 쌍둥이라서 이식편대숙주반응도 없었고 면역억제제도 3개월만 먹고 끊었고 그 후 4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특별한 부작용 없이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금 아쉬운 것이라면 글리벡이 시판된 지 5년이 지난 지금쯤 저가 만성골수성백혈병 가속기 진단을 받았다면 골수이식은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글리벡 부작용을 대처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이 개발되어 부작용에 그렇게 겁먹을 필요도 없고 그동안 간종대님을 비롯하여 골수이식을 통해 정들었던 몇몇 환자들을 떠나보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글리벡은 징검다리와 같습니다.

 

어렸을 때 아이들이 쌍둥이라고 저를 많이 놀렸고 그럴때면 저는 엄마에게 ‘왜 나를 쌍둥이로 낳았냐’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그런데 백혈병에 걸리고 난 뒤 일치하는 골수가 없어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자주 보게 되면서 엄마가 저를 쌍둥이로 낳아주신 것이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쌍둥이의 행운도 만성골수성백혈병 가속기 상태에서는 필요가 없었습니다. 보험적용도 안되었고 성공률이 20% 미만 이였기 때문입니다. 골수이식은 저에게 건너갈 수 없는 강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글리벡은 저가 죽음의 강을 건너 골수이식을 통해 다시 새 인생을 살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글리벡을 먹은지 3개월 만에 가속기 상태에서 만성기 상태로 되돌아가서 골수이식 보험적용이 가능하게 되었고 글리벡은 기존의 항암치료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최상의 상태에서 골수이식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성공률도 20%에서 80%까지 끌어올려 주었습니다. 6개월 밖에 살지 못할 거라고 했던 저가 생명의 징검다리인 글리벡을 통해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처음 백혈병에 걸렸을 때 5살짜리 딸 소령이에게 각종 학습지를 무리하게 시킨 것이 너무 미안해서 공부 같은거 잘 할 필요 없고 건강하기면 된다고 말했던 저가 요즘 딸 산수 가르쳐 주다고 너무너무 답답해서 책상을 몇 번씩 두들깁니다. 그럴때면 남편은 ‘공부 잘 할 필요 없고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면서’라고 핀잔을 주고 저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라고 대꾸합니다. 이러한 에피소드 또한 글리벡 때문에 누리는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지금과 같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수 있게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먼저는 글리벡을 개발하여 저에게 두 번째 인생을 살수 있는 기회를 주신 알렉스 마터 박사님과 저에게 특별한 애정으로 글리벡 치료를 해주셨던 김동욱 교수님, 저가 글리벡을 1년 동안 무료로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신 한국백혈병환우회와 한국노바티스, 저를 살리겠다고 사법시험 2차를 포기해야했던 남편과 자신의 건강도 돌보지 않고 저를 간호해 주신 엄마, 저에게 깨끗한 골수를 주어야 한다며 그렇게 좋아하던 고기도 안 먹고 채식만 했던 쌍둥이 언니, 엄마의 투병으로 돌잔치도 못하고 이모, 시댁, 친정을 오가며 자라야 했던 막내 정웅이, 글리벡 먹고 구토하면 엄마 아프지 말라고 등을 두들겨 주던 큰 딸 소령이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이들의 사랑에 보답하는 일은 저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생명의 징검다리가 되어 주었고 저희 가정에는 행복의 징검다리가 되어준 ‘글리벡’ 비록 저의 감사을 받아줄 감성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에게도 마지막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글리벡아, 고맙다. 정말 고맙다’

 

 

p.s: 이성임은 저의 아내이고 2006년에 쓴 투병수기입니다. 아래 사진은 아내가 만성골수성백혈병 진단 받기 전에 가족과 함께 서울대공원에 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뒤에 복스럽게 생긴 놈은 저의 둘째 아들 안정웅입니다. 벌써 초등학교 5학년입니다. 이때는 한살도 되기 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