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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칼럼)

[왜냐면] 대한의사협회에 바란다

[왜냐면] 대한의사협회에 바란다

 

2012.05.10 19 한겨레신문

안기종(한국환자단체연합회 상임대표)

 

의료분쟁조정제도 도입으로

의료사고 피해자 신속 구제 길 열려
의협 보이콧 말고 시행 동참하길

의료인은 신이 아니다. 의료인도 인간인 만큼 실수를 피할 수 없다. 어떤 실수는 사람을 상해나 사망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의료인을 처벌하는 것만이 해결책인가? 아니다. 고의가 없는 의료과실은 사회적으로 용납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의사뿐만 아니라 환자도 동의한다.

이를 위해서는 의료과실이 있을 때 의료인이 환자나 유족에게 사과하고 정당한 보상을 신속하게 하는 문화가 조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의료인은 의료과실을 인정하기는커녕 온갖 방법으로 환자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유족은 분노하고 결국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형사고발을 한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1심만 26개월 이상 걸린다. 긴 소송기간과 고액의 소송비용, 그리고 입증의 어려움으로 상처만 깊어간다. 유족 입장에서는 승소해도 득보다 실이 더 크다. 형사고발을 해도 대부분 과실범이기 때문에 무혐의 처분을 받거나 벌금형에 그친다. 몇 년 동안 이를 지켜본 유족이나 친척, 이웃, 친구, 동료들이 의료인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소송비용을 낼 형편이 안 되어 소송을 못 하는 유족도 억울해서 그냥 있을 수 없다. 머리띠 두르고 영정사진 들고 친척들 다 모아서 병원에 쳐들어가 집회하고 농성한다. 병원에서는 업무방해죄, 명예훼손죄로 유족을 고발한다. 그러면 유족들은 언론, 방송에 호소한다. 파렴치한 병원과 의료인을 비난하는 보도가 신문, 인터넷, 지상파를 통해 보도되면 의료인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전국적으로 이글이글 타오른다.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에 묻고 싶다. 의료사고와 관련된 이러한 의사와 환자의 대립·불신 문화를 바꾸자고 23년 전에 ‘의료분쟁조정법’을 발의했던 것이 아닌가? 의료분쟁조정법은 23년 동안 법무부(형사처벌특례), 기획재정부(불가항력 무과실보상), 시민사회환자단체(입증책임 전환규정 삭제)의 반대로 제정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엠비 정부가 들어서면서 외국인 환자 유치와 의료관광 활성화 정책 추진에 있어서 의료분쟁조정법의 부재(不在)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보건복지부와 청와대가 강공 드라이버를 걸어 법무부, 기획재정부를 설득했고, 시민사회환자단체가 반대하는데도 밀어붙여서 제정된 것이 의료분쟁조정법이다.

 

1년 넘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법안이 표류중일 때 국회통과를 재촉하는 성명까지 낸 의협이 자기들한테 불리한 조항이 몇 개 있다고 이제 와서 의료분쟁조정제도 자체를 보이콧하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조사협조의무 및 거부 시 처벌제도’와 ‘손해배상금 대불제도’ 그리고 ‘불가항력 분만사고 보상제도’ 등이 의료인에게 불리하다고만 주장하지 말고 환자의 신속·공정한 의료사고 피해구제에 있어서 이러한 제도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공신력 있는 감정을 기대할 수도 없고, 조정이 성립해도 신속하게 손해배상을 받을 수 없다면 어떤 환자가 의료분쟁조정제도에 참여하겠는가? 그리고 분만 중 불가항력에 의한 산모 사망과 신생아 사망·뇌성마비 발생 시 보상하는 제도는 2013년 4월8일부터 시행된다.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에 제도 자체를 보이콧하기보다는 국가와 분만 실적이 있는 의료기관 간의 보상금 배분 비율(현재 7 : 3)에 대해서는 협의를 통해 합리적인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

 

이제 고액의 소송비용, 장기간의 소송기간, 입증책임의 부담 때문에 그동안 소송을 포기했던 수많은 의료사고 피해자들이 의료분쟁조정제도를 통해 저비용으로 신속한 피해구제를 받는 길이 열렸다. 그런데 의협이 제도 자체를 보이콧하기 위해 대회원 서신문을 발송하고 가처분신청, 헌법소원 등을 제기한다는 소식은 환자들의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다름없다.

 

의협에 조언하고 싶다. 의료분쟁조정제도는 모든 국민이 원하는 제도이고 상당수의 의료인도 원하는 제도이다. 그렇다면 일단 제도 시행에 참여하고 이후 문제점을 찾아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순서이다. 병원협회, 치과의사협회 등 모두 의료분쟁조정제도에 참여하고 있다.

 

신임 의협 집행부가 환자와 의사를 위한 제도를, 그것도 전임 의협 집행부가 참여해서 시행된 제도를 보이콧하는 것은 ‘대도’가 아니다. 이러한 행보가 앞으로 있을 수많은 의료정책, 제도 논의에 있어 의협에 소탐대실의 부메랑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염려된다. 민심을 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