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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기사)

"아픈 것도 서러운데 피까지 '구걸'하라고?"

"아픈 것도 서러운데 피까지 '구걸'하라고?"

백혈병 환자와 보호자들, 인권위 점거농성 시작

2006.08.24 프레시안 강이현 기자

 

 

"당신들에게 묻는다. 남녀 공히 몸무게가 제한되며, 다른 병에 걸려 있거나 감기약을 먹고 있으면 안되고, 혈액형은 당연히 같아야 하며, 혈액검사에서 합격해야 함을 물론이고, 헌혈하러 병원을 오가는 데 몇 시간, 채혈하는 데 1시간 30분씩 소비해가며 기꺼이 도움을 줄 수 있는 헌혈자를 환자 한 명의 가족이 몇 명이나 구할 수 있겠는가?"

20여 명의 백혈병 환자와 환자보호자들이 23일 오전 국가인권위원회 7층 인권상담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은 "백혈병 환자 등 혈액질환자들이 자신의 치료에 필요한 혈액을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한심한 상황'을 해결할 때까지 농성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2004년 인권위에 이 문제에 대해 진정했으나 당시 인권위는 정부에 책임을 넘겼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며 인권위에서 점거 농성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투병생활을 해야 하는 환자와 그의 보호자가 '의약품'인 혈소판까지 직접 구하도록 하는 것은 환자의 치료를 가로막는 반인권적인 행위인 동시에 합리적 이유가 없는 '차별 행위'가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병원은 혈소판 사전예약제를 즉각 시행하라"
▲ ⓒ프레시안

이날 기자회견에서 백혈병 환자와 보호자들은 혈소판 공유자들을 구하기 위해 겪었던 고통을 호소했다.

1년전 골수이식 수술을 받았던 환자 이성원 씨는 "서른 명이 넘는 헌혈자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는 서울 시내에 있는 모든 경찰서를 다녔고 그래도 구하지 못해 군부대에 찾아가 겨우 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환자보호자였던 이기웅 씨는 "종교단체를 찾아다니고 군인들에게 밥 사주고, 차비 쥐어주면서 '도와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애원했다"며 "병원에서 치료하기 위해 돈은 돈대로 쓰고, 밖에 나가서는 피 구하기 위해 굽실굽실 해야 하는 이 고통을 누가 알아주냐"고 호소했다.

한국백혈병환우회의 안기종 사무국장은 "혈소판은 환자가 공짜로 수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비용을 지불한다"며 "피값을 내는 환자와 환자가족이 직접 피까지 구해야 하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기이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 ⓒ프레시안

이들은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혈액질환자들은 지난 수년 간 대한적십자사, 보건복지부, 의료기관에 대책을 요구했고 2004년에는 인권위에 진정했으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며 울분을 터트렸다.

또 이들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적십자사와 병원의 이윤추구, 그리고 정부의 무능함과 무관심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성분채집혈소판은 수가가 낮아서 공급을 늘리면 늘릴수록 경영수지가 악화된다', '돈이 안된다'라며 이리저리 기피해 왔던 적십자사나 이런 적십자사의 행태를 이용해 환자와 그 보호자들에게 직접 헌혈자를 구해오라고 요구하는 병원이나 우리에게는 똑같이 '돈'만 생각하는 집단으로 보일 뿐"이라고 말했다.

백혈병 환자와 보호자들은 △정부는 환자들에게 혈액을 구해오라는 행위를 중지시킬 것 △병원을 포함한 의료기관은 혈소판 사전예약제를 즉각 실시할 것 △적십자사는 돈타령만 하지말고 성분채집혈소판을 우선적으로 공급할 것을 요구했다.

 

 

 

혈소판이 부족한 이유는?

백혈병 환자와 환자가족이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 3가지를 보통 '빅3'라고 부른다고 한다. 첫째는 힘겨운 투병과정이고 둘째는 엄청난 치료비, 그리고 셋째가 혈소판을 구하는 일이다.

왜 혈소판을 환자와 환자가족들이 구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일까?

혈액질환자들은 수차례의 항암치료방사선치료를 받은 뒤 골수이식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혈소판 수치가 급격히 떨어지는데, 병원에서는 환자에게 골수이식을 앞두고 혈소판 공여자를 10~20명 정도 준비하라고 말한다. 이때부터 환자와 보호자들은 다급해진다.

환자가 혈소판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적십자사 혈액원을 통하는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직접 병원에 와서 헌혈할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적십자사 혈액원은 병원에서 요청하는 혈소판성분제재를 100% 공급해주지 못하고 있다.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헌혈자에게서 혈소판만을 뽑아낸 '성분채집혈소판'은 전혈 채혈이나 혈장 채혈에 비해 수가가 낮아서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는 이유다.

또 많은 병원에서는 적십자사 혈액원에 혈소판을 요청하기도 전에 환자들에게 '병원에 와서 헌혈을 할 헌혈자를 모집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환자들을 간병해야 할 보호자들은 경찰서, 군부대, 종교단체 등을 찾아다니며 혈소판을 제공해줄 이들을 구하러 다녀야 하는 것이다.

또 적십자사 혈액원에서 공급되는 성분채집혈소판과 달리 헌혈자가 병원 혈액원에서 혈소판 헌혈을 하는 경우 혈액검사비 5만 원 상당을 지불해야 한다. 이 혈액검사비는 대부분 환자 측에서 부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백혈병 환자와 보호자들은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병원들이 '사전예약제'를 도입할 것을 요구한다. '사전예약제'란 의료기관이 필요한 예상 혈소판을 적십자사에 48시간 전에 요청하는 제도다.

이들은 "이 제도가 활성화되면 현재 왜곡된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보호자 지정 헌혈'을 줄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들은 폐기 비용 등을 이유로 도입을 미루고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