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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기사)

[프레시안] 뒤통수 치는 보험사…요추천자는 암 수술이 아니다?

뒤통수 치는 보험사…요추천자는 암 수술이 아니다?

[기고] 어려울 때 힘 되겠다더니…환자 두 번 울리는 무책임한 보험

 

2013.10.18 프레시안 엄호식(한국환자단체연합회 편집국장) 

    

     

 

 

'된다, 된다, 된다. 안심이 된다', '걱정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봄 직한 이 익숙한 문구들은 바로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흘러나오는 보험 광고의 문구다.


국내에는 생명보험협회에 가입한 보험사가 25개, 손해보험협회에 가입한 보험사가 18개나 있다. 각각의 보험사에서 수십 개의 보험 상품을 판매한다고 가정해보면,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은 무려 수천 개에 이른다. 물론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상품이 판매될 것이라 예상된다. 보험 상품이 복잡한 만큼 소비자와 판매자 사이에는 정보 불균형이 생긴다.

보험사는 보험을 권유할 때는 무엇이든 다 보장해줄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보험금을 지급해야 할 때는 말을 바꾸거나 지급을 거절해 각종 조정과 소송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애매한 약관과 규정으로 보험에 가입하고도 제대로 혜택을 누리지 못해 가입자들의 애를 태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백혈병 환자들의 요추천자(척추에 바늘을 삽입해 뇌척수액을 추출하거나 약물을 주입하는 치료 행위)의 보험 인정 여부다.

▲ 보험 상품 광고는 어떠한 상황, 어떠한 질병이라도 가입자에게 조건 없이 모든 혜택을 줄 것처럼 이야기한다. ⓒ각종 보험사 광고 화면 갈무리

 

같은 내용의 약관, 보험금 지급은 보험사 맘대로


백혈병을 앓은 다희네 역시 이러한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다희가 백혈병을 진단받은 때는 2011년 1월 17일이었다. 진단 후 골수 이식을 받은 6월 2일까지 다희는 1번의 중심정맥관 삽입술과 6번의 요추천자를 받았다.

다희는 2005년 9월 9일부터 A생명 어린이 보험 상품에 가입되어 있었다. 발병 후 보험금 청구를 준비하던 다희 아버지는 중심정맥관 삽입술에 대해 보험금을 받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금융분쟁조정위원회가 중심정맥관 삽입술뿐 아니라 요추천자에도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뜻밖의 내용에 주변에 이 사실을 알려 보험금을 받도록 했고 자신 역시 2011년 9월 10일경 보험사에 진단서를 첨부해 암 수술 보험금 지급을 요청했다. 하지만 1개월여가 흐른 뒤에도 조치가 없어서 전화로 문의한 결과, 다희의 요추천자는 수술로 인정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 이유는 보험약관 내용 때문이었다. 약관에 "'수술'이라 함은 의사에 의하여 질병 또는 재해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경우로서 의료기관에서 의사의 관리하에 부표12(수술분류표)에서 정한 행위[기구를 사용하여 생체(生體)에 절단(切斷), 적제(摘除) 등의 조작을 가하는 것을 말하며, 흡인(吸引), 천자(穿刺), 적제(滴劑) 등의 조치 및 신경(神經) BLOCK은 제외]"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외과적 수술 없는 혈액암, 수술의 올바른 정의는?


백혈병이나 림프종과 같은 혈액암은 혈액에 암이 생기는 질병의 특성상 다른 일반 암과 달리 생체를 절단하는 수술이 없다. 뇌와 척수의 내부에는 항암제가 잘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심정맥관 삽입술' 또는 '요추천자'를 통해 항암제를 뇌척수액에 직접 주입하는 시술이 수술을 대신한다.

▲ 요추천자는 척수에 직접 바늘을 찌르기 때문에 무척 위험하고, 시술 후에는 최소 4시간에서 하루 정도를 꼼짝하지 못하고 똑바로 누워 있어야 해서 무척 힘들다. ⓒ사진 출처: 서울대학교병원

혈액암 환자들의 경우 검사와 치료가 병행된다. 요추천자는 척수에 직접 바늘을 찌르기 때문에 무척 위험하고, 시술 후에는 뇌압을 맞추기 위해 최소 4시간 이상 꼼짝하지 못하고 똑바로 누워 있어야 하기에 무척 힘들다. 또 두통과 구토, 뇌 허탈, 척수나 뇌 신경뿌리의 손상, 출혈 등의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백혈병이나 악성 림프종 등 혈액암 환자들은 요추천자와 같은 항암 치료나 조혈모세포이식 등 필수적인 치료를 받아도, '고형암을 제거하는 식의 외과적인 수술'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암 수술 보험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희 아버지 또한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제기하기도 하고 결국 소송까지 이어졌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2009년 3월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확진을 받고 6번의 요추천자 시술을 받은 양희숙 씨의 아들 역시 1999년부터 B생명의 어린이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으나, 보험사 측은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했다.

▲ 제1회 '환자 Shouting 카페'에서 샤우팅하고 있는 양희숙 씨. "수술의 정의를 백혈병에도 적용해서 보험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혈액암 환자들은 그 치료를 받지 말라는 것과 같아요."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보험에 가입할 때는 없는 것도 있게 뭐든지 다 해줄 것처럼 달콤한 말을 하더니 정작 보험비를 청구할 때는 나 몰라라 오리발을 내미는 게 화가 나요. 제가 억지로 달라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약관인데 어떤 보험사 가입자는 혜택을 받고 우리는 받지 못하니 억울하기만 합니다."

물론 다희네와 양희숙 씨와 달리 보험금이 지급된 경우도 있다. 요추천자를 외과 수술로 인정하거나, 혈액암의 요추천자를 암 수술로 인정하는 보험사도 있다. 하지만 동일한 내용의 약관에도 혜택을 받는 이들과 받지 못하는 이들의 편차가 심하고 보험사별로 해석이 달라서 결국 보험금 지급은 보험사 마음대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는 3~10회 시행되는 요추천자에 대해 2~3회만 암 수술로 인정해 보험금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포기하라는 합의를 요구하는 경우도 많다.

▲ 요추천자 항암제 주입술에 대한 보험사별 수술 급여금 지급 내역. 18개 보험 가운데 전액 지급하는 곳이 8곳, 일부 지급이 2곳, 지급을 거부하는 곳이 8곳이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더 큰 문제는 일부 보험사들이 보험금 지급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이란 피보험자가 보험금 청구권을 주장하는 데 반해 채무자인 보험사에서 보험금을 지급할 의무, 즉 채무가 없다는 취지의 소송이다. 보험사에서 보험금 지급을 늦추거나 보험금 지급액을 낮추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의 하나다. 이렇게 소송을 제기하면 환자나 보호자에게는 대기업체인 보험사를 상대로 소송해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소송에 질 경우 상대방의 변호사 비용과 소송 비용까지 떠안게 돼 보험사의 의도에 따라 합의를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혈액암 수술 정의 바꾸고, 불공정 약관 개정해야"


보험사는 약관과 더불어 외과적인 수술이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수술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요추천자는 혈액암 치료를 직접 목적으로 하는 시술이기에 수술에 포함해야 마땅하다.

법률사무소 '사람'의 정정훈 변호사는 "요추천자가 보험금 지급 사유에 해당하는 '수술'인지 여부와 일부 보험사가 요추천자에 대해 암 수술 보험금을 지급한 이유"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백혈병환우회 안기종 대표는 "혈액암은 위암이나 간암 등의 고형암과 달리 혈액에 암이 생기는 질병의 특성상 수술 자체가 없으므로 백혈병 등 혈액암에 대한 수술의 정의를 변경하는 등 불공정한 약관이 개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김영주 의원은 지난 15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를 통해 "약관상 수술에 관한 규정을 두었더라도 혈액암의 경우 평균적 고객의 이해 가능성을 기준으로 약관을 객관적·획일적으로 해석하기 어렵다"며 "고객 보호의 측면에서 약관 내용이 명백하지 못하거나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약관법에 따르면 사업자가 약관에 정한 중요한 내용을 고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하고, 이를 위반한 자에게는 5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내용이 있다"며 "이러한 불공정 보험약관을 개정해 보험에 가입한 국민이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밝혔다.

 

혜택받지 못한다면 보험료 산정도 낮춰야


주목할 점은 보험에 가입할 때 주계약과 특약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주계약은 말 그대로 보험에서 가장 기본적인 계약 부분으로 보험에 가입할 때 의무로 가입하는 주된 계약이며, 특약은 주계약을 확대하기 위한 특별약관이다. 주계약 외에도 추가로 담보되지 않는 위험을 보장받기 위해 특약을 통해 보장을 추가·확장할 수 있다.

하지만 다희네나 양희숙 씨가 가입한 보험의 경우, 혈액암과 백혈병 진단과 치료에 대한 내용이 모두 주계약에 속해 있었음에도 보험금 혜택을 받지 못했다.

보험은 주계약과 특약에 의해 계약자가 내야 하는 월불입금도 달라진다. 그만큼 보험 가입자는 각각의 사정과 필요에 맞춰 보험 설계사와 상담을 통해 미래의 보장을 약속받는다. 암 보험에서 암 수술 혜택을 받을 수 없다면 이는 보험 가입자를 우롱하는 행위이자 보험사의 이익만을 노린 꼼수 또는 보험 사기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래서 더 명확하고 세부적인 보험료 산정 기준이 마련되어야 하고 보험료 산정 방법 또한 이에 따라 더 세분되고 다양해져야 한다.

국정감사에 출석한 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은 "단순히 약관 개정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 보험 상품 설계 단계부터 따져보고 수정해야 할 것 같다"며 "금융감독위원회와 논의를 통해 시정 방향을 잡아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