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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칼럼)

[기고] 매년 1만 7000명을 살릴 ‘생명의 법’

매년 1만 7000명을 살릴 ‘생명의 법’

 

안기종(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

 

 

 

일명 ‘종현이법’으로 불리고 있는 ‘환자안전법’이 12월 29일 재석 의원 180명 전원찬성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10년 5월 29일 백혈병 투병중인 아홉 살 정종현 군이 항암제 투약오류로 사망한지 정확하게 4년 7개월 만이다.

 

 

정종현 백혈병 어린이의 빈크리스틴 투약오류 사망사건

 

2010년 5월 19일, ‘환자안전’을 우리 사회에 중요한 아젠다(agenda)로 부각시킨 시청각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종현이 사건이다. 종현이는 경북대병원에서 백혈병 투병중인 아홉 살 어린이였다. 2007년 4월 백혈병 진단을 받고, 3년간 총 16차례의 항암치료를 받았고 17차 항암치료만 받으면 완치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이 마지막 항암치료을 받다가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종현이의 정맥으로 주사되어야 할 항암제 ‘빈크리스틴’과 척수강 내로 주사되어야할 항암제 ‘시타라빈’이 의료진의 실수로 뒤바뀌어 주사된 것이다. 종현이는 열흘 동안 극심한 고통 속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사망했다.

 

 

종현이 부모는 장례를 치르고 난 뒤 ‘빈크리스틴’이라는 단어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빈크리스틴 투약오류로 사망한 백혈병 어린이가 우리나라에서도 종현이 이외 세 명이나 더 있었고 영국, 캐나다 등 외국에서도 오래전부터 큰 사회적 이슈가 되어 상세한 투약 매뉴얼이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 캐나다 재판부는 1989년 이례적으로 빈크리스틴 투약오류 사망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병원에 적절하고 분별 있는 기준을 마련하도록 촉구하는 권고안을 판결문에 적시하기도 했다

 

종현이 사건 발생 이전 3건의 빈크리스틴 투약오류 사망사건들은 모두 유족과 병원이 합의를 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이러한 환자안전사고 정보들은 다른 병원들과 공유되지 않아 빈크리스틴 투약오류 예방의 자료로도 활용되지 않았다. 종현이 부모는 종현이는 이미 하늘나라로 갔지만 제2의, 제3의 종현이가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2010년 10월 보건복지부장관에게 빈크리스틴 척수강 내 주사로 인한 의료사고 예방을 요청하는 민원을 제기했다. 보건복지부는 민원을 검토한 후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대한신경과학회와 대한병원협회를 통해 전국 병원에 ‘빈크리스틴(Vincristine) 적용 관련 유의사항 및 피해 예방법 안내’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반복되는 빈크리스틴 투약오류 사망사고와 환자안전법 제정운동

 

그 후 종현이 사건은 민사소송이 제기되어 법정공방이 진행되었으나 2012년 8월 18일 경북대병원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해 빈크리스틴 투약오류에 인한 종현이의 의료사고 개연성을 인정하고 손해배상을 하기로 발표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문제는 종현이 빈크리스틴 투약오류 사망사건이 발생하고 전국 병원에 ‘빈크리스틴(Vincristine) 적용 관련 유의사항 및 피해 예방법 안내’라는 공문이 발송된 지 2년 만인 2012년 10월 16일에 동일한 사건이 가천대 길병원에서 발생한 것이다. 6차례의 항암치료로 완치가 가능한 림프암 2기였던 강미옥(41세) 환자가 2차 항암치료를 받던 중 의료진의 실수로 ‘빈크리스틴’이라는 항암제가 정맥이 아닌 척수강 내로 잘못 주사되어 13일 만에 사망한 것이다.

 

종현이 부모는 종현 군과 같은 빈크리스틴 투약오류 사망사건이 종현이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반복해서 발생하는 것을 확인하고 빈크리스틴 투약 매뉴얼을 만들고 지키도록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환자단체들과 함께 ‘환자안전법’ 제정운동을 시작했다. 2012년 8월 18일부터는 ‘환자안전법 제정을 위한 1만명 문자청원운동’을 전개했다. 환자안전사고로 제2의 종현이가 생기면 안 된다는 절박함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고 작년 4월 9일 1만명의 이름으로 국회에 ‘환자안전법’ 제정을 청원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올해 1월에 새정치민주연합 오제세 의원과 새누리당 신경림 의원이 각각 ‘환자안전법’을 대표 발의한 것이다.

  

 

‘환자안전법’은 환자안전종합계획 수립 및 추진, 환자안전 전담기구 설치, 환자안전 전담인력 채용, 환자안전사고 보고?학습시스템 구축?운영, 중대한 환자안전사고 의무적 주의경보 발령, 보건의료인 대상 교육프로그램 운영 보고자 보호시스템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로써 국가차원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환자안전시스템을 구축하고, 보고된 환자안전사고 정보의 분석 및 재발방지방안의 개발, 공유, 학습에 주안점을 두었고, 보고된 환자안전사고 정보에 대해 비공개 및 비밀유지 의무, 보고자에 대한 불리한 조치 금지 등의 강력한 보고자 보호장치까지 마련했다.

 

의료기관평가인증원은 종현이 빈크리스틴 투약오류 사망사건이 발생한지 약 4년만인 2014년 4월 14일 병원 내 투약 오류로 인한 의료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안전한 척추강 내 약물투여를 위한 지침’을 제정했고 전국의 의료기관에 이를 배포했다. 특히 이 지침은 의료기관에 대한 실태조사부터 현장적용 검토까지 체계적인 검증 과정을 통해 마련되었으며 대한병원협회, 한국의료질향상학회, 대한소아혈액종양학회, 병원간호사회, 한국QI간호사회, 한국병원약사회, 한국환자단체연합회 7개 관련 기관 및 단체와 공동으로 개발해 환자안전의 실효성을 더욱 담보할 수 있도록 했다.

 

 

‘환자안전법’의 핵심은 환자안전사고 보고자에 대한 강력한 보호시스템 구축

 

2010년 종현이 빈크리스틴 투약오류 사망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현재 국회에서 심의중인 ‘환자안전법’에 포함된 보고된 환자안전사고 정보에 대해 비공개 및 비밀유지 의무, 보고자에 대한 불리한 조치 금지 등의 강력한 보고자 보호장치가 없었다. 따라서 빈크리스틴 투약오류 사망사건을 보고하면 실수를 한 해당 의료진이 형사처벌을 받을 뿐 아니라 의사자격 박탈까지 될 수 있기 때문에 해당 의료진 본인은 물론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다른 의료진도 보고하기 보다는 사실을 숨기고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종현이 빈크리스틴 투약오류 사망사건이 발생했을 때 강력한 환자안전사고 보고자 보호장치가 법적으로 마련되어 있었다면 종현이 사건은 보고되고 분석되어 예방 및 재발방지 방안까지 마련되어 2년 5개월 뒤 발생한 가천 길병원에서의 빈크리스틴 투약오류 예방운동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환자안전사고 예방주체로 환자를 참여시킨 ‘환자안전법’

 

병원에서 안전사고 예방활동은 주로 의사, 약사, 간호사, 의료기사 등 병원 직원에 의해 이루어진다. 환자안전과 의료서비스 질 향상을 위해 2010년 10월 출범한 의료기관평가인증원도 병원 직원들의 안전사고 예방 매뉴얼 숙지 및 준수 여부 등을 조사한 후 인증여부를 결정한다. 하지만 병원에는 직원들 말고도 안전사고 예방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강력한 그룹이 있다. 바로 환자와 환자보호자이다.

 

의사가 아무리 열심히 손을 씻어도 환자나 환자보호자가 손을 씻지 않으면 병원 감염을 막을 수 없다. 환자 대상으로 낙상 예방 교육을 아무리 열심히 실시해도 환자가 교육 받은 대로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의사나 간호사가 투약할 때 환자 동일여부, 처방된 약이 맞는지 여부, 처방약의 용량이 정확한지 여부 등을 확인하도록 되어 있지만 환자나 환자보호자가 먼저 의료진에게 자신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얘기할 수도 있다.

 

충분한 의료인력 확보와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시설투자 그리고 의료현장에서 발생하는 환자안전사고 정보가 자발적으로 보고될 수 있도록 보고자를 보호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보고된 정보가 분석되어 재발방지 대안으로 만들어져 전체 병원이 공유하고 의료진 대상으로 교육되는 국가 차원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환자안전사고 예방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환자안전법’ 제정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병원 직원들뿐만 아니라 환자와 환자보호자도 병원내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환경과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국회를 통과한 ‘환자안전법’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병원 내 안전사고 예방활동의 주체를 의사, 약사, 간호사, 의료기사 등의 병원 직원으로 제한하지 않고, 그동안 객체에 불과했던 환자나 보호자도 포함시킨 것이다. 환자안전활동의 정의,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보건의료기관의 장 및 보건의료인의 책무, 환자안전종합계획의 내용, 환자안전위원회의 업무, 전담인력의 업무를 규정한 조항에서 환자나 환자보호자를 환자안전사고 예방활동의 주체로 규정하고 있다.

 

 

환자참여형 환자안전사고 예방 캠페인 ‘투약오류 예방운동-이름·생년월일 말하기’

 

의료기관평가 인증기준의 맨 처음에는 ‘환자안전을 위한 정확한 환자확인’ 관련 규정이 나온다. 의료기관은 정확한 환자확인에 대한 규정이 있어야 하고, 의약품 투여전, 혈액제제 투여전, 검사 시행 전, 진료 전, 처치 및 시술 전에 환자를 정확하게 확인해야 한다. 정확한 환자확인 방법으로 환자이름, 생년월일, 등록번호 등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지표를 사용해 개방형 질문을 하도록 되어 있다.

 

예를 들면 “홍길동 이세요?” 또는 “1970년 6월 10일생 맞으세요?” 등과 같은 폐쇄형 질문이 아닌 “이름이 무엇이세요?”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세요?”와 같은 개방형 질문으로 매번 환자확인을 해야 한다.

 

문제는 의료진이 매일 매번 환자 확인을 위해 동일한 이름과 생년월일을 물어보니 환자로서는 짜증나고 민원을 내면서까지 항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증기준을 위반할 수 없으니 환자의 불만과 민원에도 불구하고 의료진은 환자확인 과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환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환자 확인시 매번 발생할 수 있는 이러한 불편도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 의료진이 개방형으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환자 자신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먼저 얘기하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저는 1970년 6월 10일 생인 안기종입니다.”라고 환자가 먼저 말하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 환자단체들은 의약품 투여전, 혈액제제 투여전, 검사 시행 전, 진료 전, 처치 및 시술 전에 의료진이 환자확인 과정을 거치던 거치지 않던 상관없이 환자가 먼저 자신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말하는 운동을 의료기관평가인증원, 보건복지부와 함께 전개함으로써 병원내 투약오류 예방에 환자가 참여하는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환자안전법’ 제정 의의와 보완해야할 점

 

이번에 국회를 통과한 ‘환자안전법’에도 몇 가지 미흡한 점이 있다. ‘환자안전법’은 상임위원회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하면서 병원계와 의료계의 반대로 ‘환자안전법’의 실효성 담보수단으로 도입된 각종 벌칙 조항이 삭제되었다. 일정 규모 이상의 병원급 의료기관에 대한 환자안전 전담인력 고용의무, 환자안전기준 준수의무 등을 위반해도 아무런 제재가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환자안전사고의 자발적 보고자를 보호하는 가장 확실히 방법은 재판에서 보고된 자료나 정보의 증거능력을 배제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이것도 삭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안전법’의 국회통과는 큰 의의를 갖는다. ‘환자안전법’은 전체 환자가 대상이면서 ‘환자’라는 용어가 들어간 우리나라 최초의 법이다. 또한 ‘환자안전법’은 우리나라가 개별 병원 차원을 넘어 국가 차원의 종합적인 환자안전관리체계를 구축하게 함으로써 환자안전 선진국으로 도약하게 만들 것이다. ‘환자안전법’의 다소 미흡한 점은 법률시행 후 신속한 개정을 통해 보완하면 된다.

 

 

‘환자안전법’ 제정은 환자를 살리는 ‘신약’ 개발과 동일

 

환자안전(patient safety), 우리나라 국민에게는 아직 생소한 용어다. 지금도 의료현장에서 환자들은 대부분 말기암, 백혈병, 희귀난치성질환 등 중한 질병으로 사망하고 언론, 방송을 통해 이들의 안타깝고 가슴 찡한 모습을 주로 보아왔던 국민으로서는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연간 죽지 말아야할 환자 1만7,000여명이 병원에서 안전사고로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환자안전’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나라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6,000여명인 것을 고려하면 거의 3배에 달하는 심각한 수준이다. 환자를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병원 안전사고로 환자가 죽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2001년 한국에 들어온 기적의 항암제라고 불리는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도 연간 300여명의 환자 밖에 살리지 못한다. 드라마 ‘골든타임’을 통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중증외상센터’가 선진국 수준으로 생겨도 연간 3,500여명을 살리는데 그친다. 그런데 우리나라 병원들이 이중삼중의 환자 안전사고 예방 시스템을 갖추고 병원간 안전사고 정보를 서로 공유하면서 공동 대처를 한다면 연간 1만7,000명을 살릴 수 있다. 이렇듯 병원에 환자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시스템을 갖춘다는 것은 연간 1만7,000명 이상을 살릴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앞으로 1년 6개월 후 ‘환자안전법’이 시행되어 의료현장에서 환자를 살리는 “생명의법”으로 작동한 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