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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칼럼)

[기고] 뒤늦게 만난 홍석천의 눈물, 나를 바꿨다.

 

 

▲ [사진] 홍석천씨는 힐링캠프에 출연해 자신에게 진실했던 커밍아웃 이후 13년을 얘기했다.

ⓒ SBS 홈페이지

 


지난 5일,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다. 잘 익은 김치에 내가 좋아하는 햇반으로 맛있게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켰다. 이 채널 저 채널 돌려보지만 재미있는 게 없다. 문득 SBS <힐링캠프>에 한석규가 나왔다는 기사를 본 게 기억나 IPTV를 켰다.

한석규가 나오는 <힐링캠프>는 최근 방송분이라 1000원을 내야 볼 수 있었다. 아무리 한석규지만 돈까지 내면서 그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무료로 볼 수 있는 시기부터 거꾸로 출연자를 검색해봤다. 김성령·김강우·최민수... 넘기고 넘기다 홍석천에서 멈췄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홍석천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져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한 시간 뒤, 나는 오랫동안 가슴 속 깊이 뭔가 꽉 막혔던 어떤 것이 뻥하고 뚫린 것 같았다. 내가 환자운동을 시작한 지 올해로 8년째. 그동안 동성애자 단체·에이즈 감염인 단체 등의 수많은 성소수자와 활동가를 만났고 지금도 그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 안에는 뭔지 모를 거리감이 있었다. 그 거리감을 홍석천과 <힐링캠프>가 한시간 만에 말끔히 없애줬다. 그리고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짜 '운동'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홍석천이 털어놓은 이야기, 커밍아웃 이전과 이후 13년의 삶을 들으며 나는 함께 울기도 하고 예상 밖의 반전에 박장대소를 하다가도 순식간에 진지해지기도 했다. 나는 방송을 보면서 어떤 때는 홍석천이 됐다가 어떤 때는 홍석천의 부모가 됐다가, 어떤 때는 홍석천이 입양했다는 그의 조카들이 되기도 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강조하는 종교 앞에서 그가 혼자라고, 외면당했다고 느꼈을 때의 심정을 이야기했을 때는 홍석천뿐만 아니라 나도 울었다.  

 

'환자와 함께하는 삶' 살기로 마음먹었다

 



▲ [사진] 내일부터 나는 ‘환자운동’를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함께하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 환자shouting카페 홈페이지

 


 

8년 전, 나는 의료 현장을 의사·약사·한의사 등이 아닌 환자 중심으로 바꿔 보겠다고 환자운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수많은 이슈 파이팅을 했다. 내가 국회의원에게 제안해 시행되는 법률도 있고 내가 정부에 제안해 만들어진 제도나 정책도 있다. 언론과 인터뷰도 하고 방송에 출연한 횟수도 수백 번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의료현장이 환자중심으로 바뀌었을까. 아닌 것 같다. 조금 좋아진 정도다.


그런데 <힐링캠프> 속 홍석천은 홈런을 쳤다. 그는 성소수자 인권운동가가 아니다. 그러나 수백 명의 인권운동가가 수십 년을 활동해도 하기 힘든 일을 해냈다. 홍석천의 <힐링캠프>를 본 사람이라면 이성애자와 다를 것이 없는 동성애자의 삶을 봤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성소수자를 이전보다 좀 더 이해하게 됐을 것이다.

홍석천의 입담이 탁월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의 '커밍아웃 이후 13년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권운동가가 아닌 자신에게 진실했던 인간 홍석천의 13년간의 삶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당분간은 홍석천의 <힐링캠프>를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주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성소수자 권익증진운동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나는 '환자운동'를 하는 게 아니라 '환자와 함께하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국민과 환자를 움직이는 가장 설득력 있는 도구는 언변도, 아이템도 아닌 '자신에게 진실된 삶'이라는 것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준 홍석천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안기종 기자는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