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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기사)

[세계일보] <갈길 먼 환자 알권리-3회> 의사도 감정노동자

[갈길 먼 환자 알권리] (3회) 의사도 감정노동자

 

3시간 동안 환자 100∼150명 상대… 3분 진료 당연시

 

 

2013.12.12 세계일보 김수미 기자

 

 

“상급종합병원 의사들은 3시간 동안 환자 100∼150명을 보기 때문에 진료실을 3개 열어놓고 돌아다니며 진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자 얼굴 보기도 바쁜데 환자 얘기 다 들어주고 충분히 설명할 시간이 있겠습니까?”(A대학병원 교수)

“문제 의사도 있지만, 블랙컨슈머처럼 의사를 괴롭히는 환자도 있습니다.”(B치과 원장)

진료과정에서 의사들이 환자가 궁금해하는 것을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의사와 환자 모두 부족한 진료시간을 꼽는다. 제한된 시간에 다양한 유형의 수많은 환자를 진료해야 하는 의사들도 감정노동에 시달린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모든 병원이 ‘3분 진료’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의술(醫術)’은 배웠지만 ‘인술(仁術)’은 배우지 못했다고 털어놓는 의사들도 있다.


◆‘3분 진료’ 이면의 불편한 진실

3분 진료의 이면에는 대형병원으로의 환자 쏠림, 낮은 진료수가 등 우리나라 의료체계의 문제점들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11일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5대 상급종합병원, 이른바 ‘빅5’(서울아산·삼성서울·서울대·가톨릭대서울성모·연대세브란스)의 다른 지역 환자 비중은 진료비와 내원일수를 기준으로 각각 61.2%, 52.2%에 달했다.

수도권의 한 2차 의료기관 외과의사(36)는 “갑상선과 유방암 수술은 표준화돼 있어 의술에 큰 차이가 없는데도 진단받으면 환자들은 무조건 서울로 가겠다고 한다”며 “병의원에서도 충분히 상담·치료가 가능한 환자들도 모두 3차 의료기관으로 가니 그곳에서 적정 진료시간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계에서는 ‘낮은 수가’가 3분 진료의 가장 큰 원인이라 주장한다. 2006년 건강보험심사가원 내부문건에 따르면 건강보험 진료수가의 원가 보전율은 73.9%였다. 원가가 1000원인 의료서비스에 대해 건보공단이 병원에 739원을 지급한다는 뜻이다.

병원 관계자들은 “수가가 낮으니 환자 머릿수를 채워야 운영이 되는 현실”이라고 입을 모은다.

미국에서는 통상적으로 의사 1명이 보는 환자가 하루 20∼30명을 넘지 않는다.

대한의사협회(의협) 송형근 대변인은 “미국에서는 초진 환자를 30분 이상 안 보고 의무기록이 2장 반을 넘지 않으면 보험회사에서 불성실 진료라고 돈을 안 준다”며 “대신 그에 상응하는 수가를 책정해주는데, 우리나라 수가체계에서 그 정도의 환자를 보면 병원 문 닫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와 시민단체도 진료수가 현실화에 일부 공감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는 “일부 수가가 상대적으로 낮아 조정돼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가가 인상된다고 해서 의사들이 설명의무를 다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6일 수도권 한 대학병원 외과 외래진료실에서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이재호 기자

 

 

◆배우지도, 강요받지도 않은 ‘설명의무’

그러나 낮은 진료수가 등이 의사들의 ‘설명 부족’ 원인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환자에게 반말을 일삼는 등 의사들의 엘리트주의적이고 고압적인 태도가 더 문제라는 지적이다.

의협의 한 관계자는 “주로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50대 후반에서 60대 의사 중 환자에게 반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의식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과거 그렇게 교육을 받아 습관화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은 의대 교육이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에는 진료의 기본이 인간관계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며 “치열하고 빡빡한 교육·훈련 과정에서 인성교육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환자가 원하는 질병 정보를 줘야 하는 ‘설명의무’가 법으로 강제되지도, 의사나 병원 평가에 반영되지도 않기 때문에 의사들의 책임의식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8월부터 모든 의료기관에 ‘환자의 권리와 의무’를 명시한 액자를 게시하도록 하고, 이를 어기면 1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일명 ‘액자법’이 시행됐다.

건강세상네트워크 박용덕 정책위원은 “높은 수준의 책무(설명의무)를 지키지 않았을 때 처벌하는 조항이 없다”며 “설명의무를 병원에 게시한다고 의료서비스의 질이 높아지거나 환자 만족도가 높아지지는 않는다”고 꼬집었다.